오래간만에 만나 서로
안부를 묻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새로운 얼굴이 보여.
하은코딱지 말로는 자기가
누구 코딱지인지도 알려주지 않고
‘고귀한 코딱지 집안 출신’이라고만 했다는데,
아니 그게 무슨 방구같은 소리야.
다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를 순 없지.
아무래도 먼저 말을 붙여 봐야겠어.
녀석이 저기서 다가오더니
갑자기 멈춰 섰어.
멀리서 봐도 뾰족하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걸 보니
주인이 코를 많이 파는 녀석 같은데,
대체 누구 코딱지인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두 눈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콧구멍엔 힘이 바짝 들어 간 데다
입을 앙다문 모습은
마치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의 모습처럼 보여.
내가 계속해서 힐끗거리며
바라보는데도 녀석은 이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내고 있어.
“흥흥흥 흥! 흐앗핫! 흥! 흥흥! 히얍!”
“저…. 저기……. 안녕?
나는 다운코딱지야.”
“흐응흥 흥! 히얍! 흥흥 흥! 히야압!”
“저…. 바.. 반가워.
우리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넌 어디서 왔어?”
녀석이 틈을 주지 않기에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어 보았어.
“노~ 노노노노노~! 에헴!
넌 예의가 좀 없는 것 같네.
아무 때나 아무한테나 말을 걸고 있네?
난 잠시 명상 중이었어.
점심시간쯤 되면 내가 늘 하는 일이야.
네가 좀 기다려 줘야겠어.
난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웃기는 짬뽕에 짜장면,
아니 탕수육이다.
뭐 이런 녀석을 다 봤나.
말 거는 것도 예약이 필요한 모양인데,
흥, 칫, 뿡이다.
내 코딱지 인생에 예의 없다는 말은
또 처음이네!
누가 진짜 예의가 없는 건지
두고 보면 알 테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딱딱한 코딱지 녀석이
명상인지 뭔지 하는 장면을
관찰하기 시작했어.
건방지고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만
코딱지가 하는 명상이라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하기 때문에
녀석을 관찰하는 쪽을 택했어.
코딱지는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뾰족한 머리끝을
좌우로 살살 흔들고 있었어.
그것 말고는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진 않아.
명상이라는 게 대단한 건가 싶어
보고 또 보았지만,
볼수록 하품만 쏟아져 나오네.
녀석의 명상을 지켜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이봐, 자는 거야?
애타게 부를 때는 언제고
그새 잠이 들었나 보네,
역시 제멋대로군.”
잠결에도 기분이 확
나빠지는 목소리가 들려. 이 녀석이 정말!
“뭐, 뭐라고…?”
“아까 누구 코딱지라고 했지?
다람쥐 코딱지라고 했었나?
내가 기억력이 좀 약하거든.”
뾰족하게 생긴 코딱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뻔뻔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어.
“다람쥐가 아니라 다운코딱지라고!
어휴 진짜 어이가 없네.”
“다운코딱지? 그래 반가워.
나는, 그냥 코딱지라고 불러.
누구의 코딱지 인지는
궁금해할 것 없고.”
“뭘 그렇게 숨기는 거야?
네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다면
난 그냥 널 뾰족 코딱지로 부를 거야.
멀리서 봐도 넌 정말 뾰족해 보이거든.”
“흠, 그건 네 마음대로 하도록 해.
이름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나야 워낙 고귀한
집안의 코딱지라서
이름 따위에 목숨 걸지 않아.
내 주인은 코딱지 파기라면
누구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골고루 파고,
코딱지도 멀리멀리 보내주거든.
지난여름엔 다른 사람들의
옷에 이리저리 붙었다가
프랑스에도 다녀왔고,
시골 할머니 댁 텃밭에도 다녀왔고,
백화점 화장실에도 가봤지.
가장 재미있었던 곳은
유명한 스파게티 전문점 주방이었어.
내가 운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도
손님에게 나가는 접시에 함께
올려져 나갈 수 있었는데
수석 주방장의 눈에 딱 걸리는 바람에
주방 휴지통으로 쓸려 들어갔지. 하하하.”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뾰족코딱지는
혼자 실컷 이야기하고 웃고 있어.
뾰족코딱지는 상대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야.
여기저기 여행 다닌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나도 여행을
많이 다니던 때가 생각이 나서
그만 우울해져 버렸어.
나도 잘나가던 시절엔
매일같이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곳이었고,
새로운 코딱지들을
만나서 사귀는 것은 일상이었는데,
이젠 방구석에서 밖으로
나갈 꿈만 꾸고 있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은
앞으로도 넘치게 많을 거라고
말하던 엄마 코딱지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장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어.
집에서는 엄마 코딱지의
말이 잔소리 같아서 듣기 싫었는데,
집 밖으로 나오니 오히려
위로의 목소리처럼 느껴지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여행을
많이 하던 집안이었어.
내 주인은 언제나 나를 최고로 대우해주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에게
여행할 기회를 주거든.
우리 엄마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10개국 이상을 여행한
코딱지들로 유명해.
게다가 코딱지 길게 말기
대회에서도 우승하신 유명 인사라고.
우리는 길고 튼튼하기로
이름난 가문이야. 네가 만약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다면
내가 여행 다니며 길쭉한
몸매를 뽐내는 걸 구경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뾰족코딱지의 끝날 줄 모르는
자랑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것 같아.
“그래 알겠어. 난 이제 그만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친구들? 친구가 있어?
내 이야기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진짜 갈 거야?”
“응 진짜 가야 해.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많거든.”
“할 이야기가 많아? 나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같이 가야겠네.”
뾰족코딱지는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휘파람까지 불며 따라왔어.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네.
“다운코딱지야, 어디 갔다 왔어?”
하은코딱지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뒤따라온
뾰족코딱지 녀석이 내 앞을 막아섰어.
“다람쥐코딱지는 나의 고귀한
인생 이야기를 듣느라 좀 바빴어.”
뾰족코딱지 녀석은 또다시
제멋대로 말하기 시작했어.
“다람쥐가 아니라니까, 이 녀석이 정말!”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뾰족코딱지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음, 너는 누구니? 나는 하은코딱지야.
얘는 다람쥐가 아니라 다운코딱지고.”
“내 이름은 알 것 없어.
나는 그냥 코딱지라고 불러.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뾰족코딱지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는 모양이야.
정말 못 말리는 꼴불견이네.
책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이든 코딱지가 갑자기 끼어들었어.
“어, 너? 현수코딱지 아니야?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이든코딱지의 말에 뾰족코딱지가
당황하는 눈치야.
“너, 너, 넌 누구냐?”
“누구긴~ 이든코딱지지.
현수는 아직도 코 많이 파는구나,
네가 여기까지 온 걸 보니. 큭큭.”
“이든코딱지... 오랜만인걸?”
“현수코딱지야, 현수 동생 진수였나?
그 아기는 많이 컸어?
현수가 진수 태어나고
코를 엄청나게 파기 시작했었잖아.”
“별걸 다 기억하네. 진수는 벌써 네 살이야.
현수는 아직도 동생에 대해
질투를 하고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콧구멍을 파고 있어.”
뾰족코딱지, 아니 현수코딱지는
어느새 잘난 척하던 고귀한
가문의 코딱지 가면은 벗어버리고
고분고분하게 대화하기 시작했어.
“현수 녀석 여전하구나.
어쨌거나 잘 왔어, 반갑다
현수코딱지야.”
이든코딱지가 현수코딱지를
단번에 순한 양으로 만들어 버렸어.
이든코딱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현수코딱지야, 근데 너 고귀한
가문에다가 여행을 많이 했다는
그건 무슨 말이야?
네 이름도 안 알려주고
돌아다닌다면서?”
이든코딱지의 물음에
현수코딱지는 얼음처럼 꽁꽁 얼었어.
“아, 아니, 그게.
내가 여행을 좀 많이 다녀봤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냥, 좀…….”
“현수코딱지야. 여기에
여행 많이 안 다녀 본 코딱지가
어딨다고 그래~
다른 코딱지들의 기분도 살펴야지.”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아, 맞다. 널 정식으로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
얘들아 이 친구는 현수코딱지.
다운코딱지랑은
어릴 때 자주 놀았을 텐데,
기억 안 나?”
이든코딱지의 소개로 드디어
정식으로 현수코딱지를 소개받았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현수코딱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어.
어릴 때 다운이와 현수가
자주 같이 놀았다는데,
내 기억 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다시 인사할게, 뾰족코딱,
아니 현수코딱지야. 반갑다.
나는 다람쥐 말고 다운코딱지야.”
“안녕. 나는 하은코딱지.
현수 이야기는 다운이 통해서
많이 들었어. 귀여운 동생이라고.”
“반갑다. 나는 무림코딱지.
나는 여행 경험이 별로 없는데,
네가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다꼬?
내한테 따로 이야기 좀 해줘라~”
나와 하은코딱지 그리고
무림코딱지까지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어.
이름을 알고 인사를 나누니
현수코딱지의 인상이
훨씬 더 부드러워 보여.
“다들 반가워. 나는 현수코딱지야.
사실, 난 너희들과 친구가 되어서 기뻐.
새롭게 만나는 코딱지들이
다들 내 이야길 잘 안 들어 주더라고.
그런데 아까 다운코딱지가
처음으로 내 이야길
가만히 듣고 있는 거야.
그래서 다운코딱지를 따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현수코딱지는 그제야
진짜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어.
“그런 거라면, 좀 친절하게 굴지
왜 그렇게 사납게 굴었던 거야?”
“잘난 척하거나 관심을 끌 행동을
하지 않으면 다운코딱지 너도
내 이야길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미안했어.”
“그래. 솔직하게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안 그러면 진짜 너를 이상한
녀석으로 오해할 뻔했어.
이제 우리랑 같이 만나고 이야기하자.”
현수코딱지가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녀석을 미워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친구가 되는 거라면 문제없지!
이제 솔직하게 살아.
그러면 널 미워할 코딱지는
아무도 없을 거야.”
역시 멋진 이든코딱지야.
다운이와 하은이, 이든이,
그리고 무림이만
어른스러워진 줄 알았더니
우리 코딱지들도 조금은
성장을 한 모양이야.